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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30. 15:52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34 탄허록呑虛錄

 

탄허 지음

2012, 휴

 

 

대야도서관

SB071780

 

224.2

탄94ㅌ

 

미래사회의 주인공에게 남긴

100년을 내다본 지혜 모음

 

유불선 3교 융합을 나침반 삼아

우주관과 생사관을 꿰뚫은 탄허 스님에게 듣는다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도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 데 쓰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돈벌이하는 것은 가난한 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고통스러움을 어떻게 벗느냐 하는 데 있어 성인의 구원을 받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스스로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 시끄럽고 고통스러운 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사의 큰 문제를 자유자재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라 하겠다. - 본문 중에서

 

"물 한 잔으로 산불을 끌수는 없다.

한 개인, 한 종교인의 힘은 미약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 한 잔 물이

동해물로 변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탄허

1913년 독립운동가 율재栗齋 김홍규金洪奎 씨를 부친으로 전북 김제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택성鐸聲, 신식 학교 교육이 시작된 시절이었으나 엄격한가통家統에 묶여 신교육은 엄두도 못 내고 집에서 수학했다. 20세까지 유학을 공부하다가 다시 3년간 도교에 심취하였는데, 지금 '노장 철학의 대가'로 손꼽히는 도교 지식도 이때에 흡수한 것이다.

탄허 스님이 입산한 것은 22세 때의 일로, 17세에 성혼하여 이미 아들까지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평생의 스승을 찾아 동서남북으로 구도의 편지를 띄우기 수년,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한암 스님의 성화(聖華 : 훌륭한 이름)를 듣고 편지를 낸 데서 불교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첫 답장이 오고 다시 편지 왕래를 하기 3년, 갓 쓰고 도포 입은 유생은 "짧으면 3년, 길어야 10년"을 기약하고 오대산을 찾아들었으나, 한암 스님의 인품에 매료되어 이것이 영영 탈속의 길이 되었다.

스승인 한암 스님이 입적하기까지 21년 동안 줄곧 상원사에 머물렀던 탄허 스님은 6 · 25 이후 동래 범어사, 통영 용화사, 삼척 영은사 등지에 잠시 몸을 담았다가 격화하는 비구 · 대처 싸움을 피해 다시 상원사로 갔다. 이 시기를 제외한다면 그의 승려 생활은 오대산 상원사에서 보낸 것이 대부분이다.

1955년 한국대학(지금은 폐쇄됐음)의 요청으로 맡았던 노장철학老莊哲學 강의는 오늘날까지 명강의로 유명하다. 처음 1주일 예정이었던 것이 수강생들의 요청으로 두 번에 걸쳐 연장, 두 달간을 끌었다. 이 강연의 수강생 명단에는 함석헌 선생에서부터 양주동 박사에 이르기까지 당대 쟁쟁한 학자들도 적잖게 포함되어 있어 근의 명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다.

한암 스님은 생전에 화엄경론의 집필을 기구했었는데, 수제자 탄허 스님의 10년에 걸친 대불사도 그의 유촉에 의한 것이다. 1961년 그 유촉을 받들어 방대한 규모의 화엄합론 번역을 시작했다.

'자구字句 하나하나에 피가 맺히는 난해한 연의演義 작업'에 매달려 발원한 지 10년만인 1971년 봄, 원문 10조 9만 5천 48자에 달하는 《화엄경》 80권 집필을 마쳤다.

부처가 행한 49년의 설법 중에서 가장 심오하고 위대하며 광대무변하다는 《화엄경》은 일본에서 번역 · 출판된 적은 있으나 논論을 번역, 주석한 학자는 없었다. 화엄학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의 집대성이라고나 할 이 집필은 원고지로 6만 2천 5백여 장이나 되는 대불사이며, 출판 경비가 당시 돈으로 무려 수천만 원으로 추정되어 탈고 2년 만이 지난 시점까지 출판 기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이 예기를 들은 일본불교신도회에서 원고를 사겠다고 나섰지만, 탄허 스님은 이를 뿌리쳤다. 후대에라도 좋으니 우리나라 국민들의 손에 이 원고를 꼭 넘겨주고 싶은 염원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 원고는 1975년 《신화엄경합론》이란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탄허 스님은 역해 완간 공로를 인정받아 동아일보사 주최 제3회 인촌문화상을 수상했다. 이 경전은 자상한 주석을 곁들여 우리말로 옮겨 놓음으로써 "원효 · 의상 대사 이래 최대의 불사"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생을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에 전념한 탄허 스님은 선교 양종에 수 많은 업적을 쌓았고, 이러한 체계 위에서 동양의 마음을 찾으려 애쓴 대표적인 학승이었다.

1983년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들기 전까지 탄허 스님은 동양의 역학 원리로 어제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역사를 예지한 선지식이자 선지자였으며, 비록 몸은 산간에 머물렀으나 눈은 우주의 운행을 꿰뚫어 보았다.

 

사진으로 보는 탄허 스님의 일생

 

탄허 선사 평복 진영

20세 때 입산 전 글방 앞에서

32세 때 동문수학한 속가 친구

월강 선생과 함께

1967년 3월경 10년 만에 드디어 63,000여 장에 달하는

《신화엄경합론》 번역 원고를 탈고하다.

1956년 가을 무렵부터 수도원의 교재로 쓰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신화엄론경합론》 등에 대하여 번역에 착수하다. 본경에는 《화엄경》 80권과 《통현론》 40권, 청량 국사 《화엄소초》 150권, 《회석》 7권, 《현담》 8권, 보조 국사의 《원돈성불론》 1권,  계환 선사의 《화엄요해》 1권과 탄허 스님의 주석 등 287여 권의 집대성이다.(탄허 스님 역저서 모음)

말년에 집필하던 대전시 유성 자광사慈光寺 전경. 대전에 자광사를 창건한 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장경과 소지품을 이곳으로 옮겨 '장경각藏經閣'이라 이름하고 장경 번역에 몰두하면서 제방의 지인들을 접견하며 출판을 계속하다.

1979년 대구 거사림居士林에서 수차례 청법하여 대구 극장에서 법문하시던 모습.

탄허 스님이 직접 쓰신 글씨와 열반에 드신 처소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

1983년, 5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미질微疾이 봄에 이르러 더욱 더 악화되다.

음력 4월 24일(양력 6월 5일)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에서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열반에 드시다.

열반 당시 시봉 환원 수좌가 물었다.

"스님, 여여如如하십니까?"

"여여하지 몽롱하랴!"

제자 대규수중 수좌가 말했다.

"법연法緣이 다 된 것 같습니다. 한 말씀 남겨 주십시오."

"일체무언一切無言이다!"

때는 선사가 66세에 입적할 때를 예언하신 날이다.

열반 당시 사부대중 50여 명이 선사의 입적을 지켜보며 오열했다.

1986년 4월 24일(음력) 오대산 상원사에 부도浮屠와 비碑가 세워지다.

 

|차례|

 

사진으로 보는 탄허 스님의 일생

책 머리에_다언多言의 병

내가 만난 탄허

 

|1장|

예지_대한민국과 주변국의 미래를 보다

· 도道가 깊어지면 예지도 깨어난다

· '보통 사람과 다른 선견지명이 있다'

· 국난이 닥칠 것을 예지로 간파한 인물들

· 역사에도 인과응보가 있다

· 한반도가 세계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 대한민국과 주변국의 관계에도 음양의 이치가 작용하니

· 빙하가 녹고 일본 열도가 침몰하리라

· 동아시아가 세계사를 주도하리라

· 비책秘冊에 담긴 민족사의 수수께끼

 

|2장|

정치_지도자의 역량이 국운의 방향타

· 지도자가 신뢰받을 때 법法과 영令이 바로 선다

· 법과 형벌로 다스림은 하수의 정치다

· 탐심 있는 지도자를 경계하라

· 먹을 게 적은 것보다 공평하게 분배 못 하는 것을 걱정하라

· 국가의 미래를 밤새워 고민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라

· 나라의 운명, 지도자의 심성에 달려 있다

· 국민을 위한 철학부터 갖추라

· 도덕을 숭상한 조상의 덕이 후세에 미치리라

· 미래 사회를 준비할 도의적 인물이 절실하다

· 국운이 트이는 시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3장|

철학_한 마음이 꿈을 일으키고 우주를 일으키니

· 술術은 도道가 아니다

·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이 끊어진 각覺을 좇아야

·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놈이 제일 오래 사는 놈이다

· 마음은 우주의 본체

· 안목과 근기에 따라 수행법이 다르다

· 꿈인 줄 알면 해결되는 지혜

· 성인은 성性의 자리, 범부는 정情의 마음자리

· 생명이란 연緣을 만나 운행하게 되는 것

· 무엇으로 평생의 도道를 삼을 것인가?

· 교리에도, 불립문자에도 집착하지 말라

· 부처님은 오고가는 것이 없다

 

|4장|

생사_태어난 이여, 죽음을 피할 길 없구나

· 참선 문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는 벗어 던져라

· 예禮, 법法, 정情으로 살아가는 삶

· 한마디 이르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죽는다

· 참선, 마음공부의 핵심

· 근기에 따라 생사를 초월하는 방편들

· 잘못된 수행법

·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유로이 해결하는 법

· 생사 문제를 해결한 선사들

· 고요한 곳에서 도를 닦는 것은 시끄러운 데 쓰기 위함이다

· 참되게 안다면 실행은 그 앎 가운데 있다

· 교敎와 선禪, 불교를 이끄는 두 개의 바퀴

· 지知와 覺, 앎과 아는 것이 끊어진 자리

· 생사일여관에는 두려움이 없다

생의 의미와 죽음의 초극

 

|5장|

종교_3대 성인이 세상에 온 까닭을 아는가

· 자기 자신自信을 회복하는 길

· 종교는 바로 내 마음

· 천당 지옥의 유치원 법문이 생긴 까닭은

· 시공이 끊어진 자리

· 우주 만유가 있는 그대로 평등하다

· 구원 받는 2가지 방법, 사참事懺과 이참理懺

· 인류의 소장성쇠는 불멸의 법칙

· 화엄학의 가르침,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 말세라도 정신을 차리면 도에 이른다

· 자신이 바로 서지 않고서 누구를 선도하겠는가

· 앞으로 다가올 미래, 종교의 교파를 넘다

 

Q & A 탄허 스님에게 듣는다

탄허 스님의 연보

 

"도가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예지 능력이 생길 수 있다.

날짐승이나 동물들도 예지 본능을 가지고 있는데,

하물며 사람의 예지 본능이야 어떠하겠는가."

"산불을 물 한 잔으로 끌 수는 없다.

한 개인 한 종교인의 힘은 미약하다.

하지만 언젠가 그 한 잔 물이 동해물로 변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생衆生'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고요한 곳에서 도 닦는 것은 시끄러운 데 쓰기 위함이다.

돈벌이하는 것은 가난한 데 쓰자는 것이요.

깨달음은 얻어서 수많은 중생구제를 하기 위함이다."

"발심發心은 선후가 있을지라도

도道를 깨닫는 데는 앞뒤가 없다."

 

 

 

 

 

 

 

 

posted by 황영찬
2013. 3. 29. 09:0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33  전통 목가구

 

글, 사진 / 김삼대자

1997,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15

 

082

빛12ㄷ  159

 

빛깔있는 책들 159

 

김삼대자----------------------------------------------------------------------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에서 장식미술을 전공하였으며,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

 

|차례|

 

전통 가구의 성격

전통 목가구의 종류

가구의 양식 형성과 발달

가구의 종류와 특징

재료와 제작 기법

가구의 보존과 관리

소목장과 장전

양식의 단절과 기법의 부활

참고 문헌

 

▲ 이층장  머름칸, 쥐벽칸 등 알갱이는  오동나무이며 뼈대는 배나무이나 쇠목과 동자주는 반월모의 부드러운 곡선으로 처리하여 오동나무의 직선 무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장 몸체를 받치는 마대는 박쥐가 날개를 펴고 나는 형태를 하여 복이 깃들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101×35.5센티미터, 높이 83센티미터. 정해동 소장.

▲ 사방탁자  하단에 서랍과 장이 부착된 4층 사방탁자이다. 먹감나무의 무늬를 대칭되게 배치하여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46×41센티미터, 높이 141센티미터, 개인 소장.

▲ 반닫이  반닫이는 다목적 가구이므로 안방에서 광에 이르기까지 두고 사용하였다. 이 반닫이는 내면에 3개의 서랍이 있으며 여성용 가구에 주로 장식되는 호리병 경첩이 달린 것으로 미루어 안방용임을 알 수 있다. 96×47센티미터, 높이 56.5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농  농은 이층장과 그 형태가 같아 보이지만 농은 아래위층이 분리되며 장은 분리되지 않는 점이 다르다. 개인 소장.

▲ 각게수리  각게수리는 금고의 일종으로 원래 부유한 집 사랑에서 쓰던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에는 내실에서도 사용되었다. 61×38센티미터, 높이 4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좌경  조선시대 후기에 거울이 보급되면서 제작되기 시작한 이래 그 사용이 널리 유행되었다. 뚜껑을 열면 뚜껑에 달린 경첩이 꺾어져 뚜껑 안쪽에 부착된 거울이 비스듬히 서도록 지탱해 준다. 높이 16센티미터. 개인 소장.

▲ 빗접  화장과 머리 단장할 때 쓰는 요즈음의 화장대이다. 여성용 빗접은 주칠이나 나전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순수한 나무 제품은 드문 편이다. 빗접은 거울이 보급되면서 좌경으로 대치되었다. 개인 소장.

▲ 경상  경상은 사찰에서 불경을 읽을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도 사용되었다. 서랍의 양끝이 들렸으며 다리와 서랍 등에 조각 장식을 한 것이 특징이다. 개인 소장.

▲ 서가  서가 가운데는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층널에 변화를 준 것이 더러 있다. 쌍으로 된 이 서가는 사방탁자와 유사하여 독특한 공간 분할을 보여 준다. 48.3×30.6센티미터, 높이 162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궤  크기가 큰 궤는 대부분 광에 두며 작은 것은 방에 두고 사용하였다. 74×35센티미터, 높이 37센티미터. 개인 소장.

▲ 약장  가정에서는 대부분 이와 같은 각게수리 약장을 사용하였다. 42×20센티미터, 높이 34센티미터.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 뒤주  튼튼한 네 다리와 면판의 뚜렷한 나뭇결은 밤섬 뒤주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58.5×40센티미터. 한광호 소장.

▲ 찬탁  찬탁은 사기나 놋쇠 등 무거운 그릇을 얹어도 튼튼하도록 기둥과 쇠목 등이 굵은 점이 특징이다. 94×41센티미터, 높이 148센티미터. 개인 소장.

▲ 반짇그릇  반짇그릇은 버들, 대, 종이 등으로 만든 것이 많으며 나무로 된 것은 귀한 편이다. 나무로 된 것은 이 반짇그릇에서 볼 수 있듯이 한 면에 방형의 뚜껑 달린 칸을 설치하는 것이 통례이다. 40×40.5센티미터, 높이 11센티미터. 김창실 소장.

▲ 함  함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의 일종으로 내실용은 대부분 칠을 하거나 자개로 만든다. 이 함은 특히 길채가 긴 것이 특징이다. 40×24.5센티미터, 높이 24센티미터. 개인 소장.

▲ 3층장  알갱이가 용목(龍目)인 이런 양식의 장은 1800년대에 많이 제작되었다. 용목은 나무의 혹을 켜서 그 무늬가 독특하다. 104.2×51.3센티미터, 높이 165.2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각게수리  문목의 여닫이문에 제비추리 경첩을 여러 개 달아 견고한 느낌을 준다. 69.5×43.5센티미터, 높이 64센티미터.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 서안  판재를 이용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다리를 겸한 양측 널에 여의두문(如意頭文)을 투각하여 장식 효과를 나타내었다. 59×29.5센티미터, 높이 23.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책장  3층의 소형 책장으로 단단한 짜임새는 귀중본을 넣었던 책장임을 짐작케 한다. 61×32.5센티미터, 높이 93.5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연상  무늬목을 이용한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 후기 연상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32×15센티미터, 높이 18.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문갑(단문갑)  문갑은 각종 문방 용품을 보관하는 가구로서 하나로 된 단문갑과 쌍으로 쓰이는 쌍문갑의 두 가지가 있다. 단문갑은 쌍문갑에 비해 길이, 높이, 폭 등이 큰 편이다. 113×35.2센티미터, 높이 42.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돈궤  윗닫이인 큰 궤를 흔히 돈궤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돈궤는 크기가 작으며 엽전이 들어갈 작은 구멍이 문판 중앙에 뚫려 있다. 29.8×208센티미터, 높이 20.5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반닫이 내부  내부 문판 높이에 서랍과 개구부 등 문갑 양식을 설비하였다. 106.5×47.4센티미터, 높이 91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이층 반닫이  반닫이 가운데 이례적인 형태로 수납물의 분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 이층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02×48센티미터, 높이 89.8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원앙 반닫이  해로하라는 의미에서 결혼 예물로 만들기도 하며 노부부의 수의를 보관하기 위해서도 만들었다. 138.6×38.5센티미터, 높이 66.5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개구멍 반닫이  개구멍은 앞면 중앙부에 난 작은 문이 마치 울타리에 뚫린 개의 출입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73.3×39.6센티미터, 높이 42.8센티미터.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 책탁 반닫이  반닫이와 서탁이 함께 설치된 양식으로 반닫이에는 귀중품을 넣고 서탁에는 책을 얹도록 설계한 사랑방 가구이다. 81.5×32센티미터, 높이 103센티미터. 개인 소장.

▲ 반닫이장  반닫이와 서랍을 적절히 배치하여 물품의 용도별 수납을 간편하게 하도록 설계되었다. 103.5×37.5센티미터, 높이 99센티미터. 김필환 소장.

▲ 강화 반닫이  자물쇠 좌 우의 광두정, 표자형 경첩, 이마에 달린 길목 등 강화 반닫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87×55센티미터, 높이 97.5센티미터.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평안도 숭숭이 반닫이  평안도 일대 특히 박천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숭숭이 반닫이는 피나무 바탕에 주철을 하고 무늬를 숭숭 뚫어 만든 무쇠 장식을 대어 숭숭이 반닫이란 이름이 붙었다. 85×45센티미터, 높이 85센티미터, 개인 소장.

▲ 금침장  이불을 넣는 금침장으로 가는 띠살을 촘촘히 대고 안쪽으로 종이를 발랐다. 96.3×49.3센티미터, 높이 181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약장  약재를 쉽게 구분하기 위해 소규모 한약방에서 사용하던 약장으로 하단의 분합문이 달린 장에는 희귀약이나 극약을 보관하였다. 129.5×35.5센티미터, 높이 121.5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각게수리 약장  각게수리 형태 가운데 비교적 큰 편에 속하는 이 약장은 가정에서 상비약을 보관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다. 90×26센티미터, 높이 118센티미터.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목침 겸용 좌경(왼쪽)  남성용 좌경은 대체로 소형이며 목침을 겸용하도록 만든 예가 많다. 12×18센티미터, 높이 8.5센티미터. 덕성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 좌경(온른쪽)  유리 거울이 보급되면서 빗접 대신 제작되어 사용되어진 재래식 화장대이다. 20×27센티미터, 높이 13센티미터. 김필환 소장.

▲ 쌍영총 주실 북벽 부부상  왕으로 추정되는 주인공 부부가 평상에 앉아 있다. 고구려 벽화 고분.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안성리 소재.

▲ 정이상소(鄭李上疏)  『오륜행실도』 권2의 충신에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의 충신 행적(忠臣行跡) 그림.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의 만행을 공민왕에게 상소하는 장면으로 탁자와 와탑을 볼 수 있다.

▲ 최덕지(崔德之) 영정(보물 제594호)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은 이 초상화는 조선 초인 15세기 그림으로 당시의 가구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124×68센티미터. 전주 최씨 문중 소장.

▲ 각저총 주실 북벽 벽화  무사로 보이는 주인공이 칼을 찬 채 의자에 앉아 있으며 짐승의 다리를 한 3족 및 4족의 탁자 위에는 주전자, 음식, 칼 등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고구려 벽화 고분. 중국 집안형 여산 소재.

▲ 교의(보물 제930호)  헌종 9년(1668)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이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이 교의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좌판은 끈으로 엮어 접기에 간편하도록 되었으며 좌판 위에는 방석을 얹도록 되어 있으나 방석은 결실되었다. 폭 77.4센티미터, 높이 93센티미터. 이훈상 소장.

▲ 「조일통상조약기념연회도」  조선 고종 20년(1883)에 체결한 조일통상조약을 기념하는 연회 장면 그림으로 조선 말기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려는 시기의 풍속을 살필 수 있다. 견본 채색. 1883년 안중식 그림. 53.9×35.5센티미터.

▲ 서안  네 개의 판재로 만든 간결한 양식의 서안으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러한 양식의 문방 가구를 애용하였다. 89.3×26.6센티미터, 높이 29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현보(李賢輔) 영정(보물 제872호)  1536년에 제작된 이 초상화는 경상의 사용 예를 보여 주고 있다. 견본 수묵. 105×126센티미터.

▲ 탁자장  사방탁자와 유사하나 3면이 막히고 한 면에 개구부가 있는 양식을 탁자장이라 부른다. 69×31.8센티미터, 높이 93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사방탁자  네 기둥과 층널로만 된 이러한 양식의 사방탁자는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35.2×35.2센티미터, 높이 150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책갑  한 질의 책을 넣기 위해 만든 상자로 문은 밀어 열도록 만들었다. 21×16.5센티미터, 높이 9.7센티미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찬장 겸용 뒤주  뒤주와 찬장을 겸용하도록 만든 부엌 가구로서 위쪽이 뒤주이다. 너비 99.8센티미터, 높이 98.2센티미터.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posted by 황영찬
2013. 3. 28. 10:12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32 三國志 6 영웅은 큰 뜻을 남긴다

 

나관중 지음 · 정비석 옮김

2007, 은행나무

 

시흥시대야도서관

SB014859

 

823.5

나15삼6  6

▲ 손권

▲ 손권

 

◎ 등장인물

 

사마염司馬炎(236~290년)

진(晋)의 초대 황제. 재위 265~290년.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맏아들이다. 사마씨(司馬氏)는 이미 3대에 걸쳐 위 왕조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었는데, 사마염은 그 기세를 몰아 위 황제인 조환에게 황제위를 물려받고 진 왕조를 일으켰다. 아버지인 사마소 시절에 이미 촉나라를 평정했기 때문에 사마염에게는 오나라를 멸하여 천하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커다란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즉위 후 스스로 검약에 힘쓰는 한편 내부 결속을 도모했다. 267년, 드디어 중신인 양호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오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왕준에게는 장강 상류의 익주에서 수군을 정비하게 했다. 그러나 오나라에서도 명장인 육항이 장강 일대에서 방어에 힘써 두 나라 군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 대치는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279년에 드디어 진의 수륙 20만의 대군이 일제히 남하하여 결국은 이듬해에 오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등애鄧艾(?~264년)

위(魏)의 명장. 자는 사재(士載). 사마의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농정(農政) · 통운(通運)에 큰 업적을 이루어냈다. 또한 오나라에 대한 전략으로 둔전책(屯田策)을 실행해 성공적인 성과를 올렸다. 255년, 관구검 · 문흠 등의 반(反)사마씨 거병 때 연주 자사였던 그는 기동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하여 승리의 계기를 만들었다. 263에는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서쪽 방면의 군사들을 지휘하여 산을 깎고 하천에 다리를 놓아 험한 길을 개척하여 대번에 성도에 육박했다. 그리하여 10월에는 사찬과 아들 등충을 격려하며 제갈첨 · 장준 등의 목을 베고 촉주 유선의 항복을 받아 드디어 성도 입성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이듬해 반란의 기색이 보인다는 사찬 · 종회 등의 무고로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공손연公孫淵(?~238년)

요동(遼東)의 호걸. 228년, 위나라 명제로부터 요동 태수에 임명되었으나 오나라의 손권과도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이에 위나라에서는 그에 대해 문책의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공손연은 무력으로 이를 물리쳐버리고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자립했다. 그리하여 위나라에서는 사마의를 총대장으로 삼아 토벌군을 파견했고 공손연도 요수를 따라 방위선을 구축했으나 사마의의 양동작전으로 패하고 본거지인 양평으로 물러갔다. 한때는 위의 포위공격을 막아냈으나 총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결국 그는 항복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도망을 가다가 결국 목 베어 죽임을 당했다.

 

강유姜維(202~264년)

촉(蜀)의 장수. 자는 백약(伯約). 원래 위나라 장수였으나 제갈공명에게 투항하여 크게 신임을 얻었다. 그는 제갈공명이 죽은 뒤 철수하는 중에 사마의의 추격군에게 쫓겼는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리치는' 전법으로 전멸의 위기에 빠진 촉군을 구했다. 소극파인 비위가 죽은 뒤 위와 치열하게 싸웠으나 후주 유선이 투항하자 위의 장군 종회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264년, 종회를 부추겨 위나라를 배반하도록 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주이朱異

오(吳)의 장군. 253년, 제갈각의 대위(對魏) 작전에 종군했으나 제갈각의 작전을 비판하다 지휘권이 박탈되었다. 257년에 위나라의 제갈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대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여장수(黎奬水)에서 위나라 군사에게 격퇴당해 군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하안何晏(?~249년)

위(魏)의 학자. 자는 평숙(平叔). 어머니가 조조의 측실이었다. 문제 · 명제 시대에는 냉대를 받았으나 조상(曹爽)이 실권을 잡자 황제 비서가 되어 긍정 문화의 중심인물로서 현학(玄學)을 창조하고 청담(淸談)을 널리 폈다. 후에 사마의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풍李豊(?~254년)

위(魏)의 중신. 254년, 위나라 황제 조방의 명으로 장즙 등과 함께 사마사 타도를 모의했다. 그러나 이 모의가 사마사에게 발각이 되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누가 미칠 것이 두려워 일부러 악담을 퍼부어 사마사의 분노를 사서 죽음을 자초했다.

 

장익張翼

유비의 장수. 자는 백공(伯恭). 원래 유장의 수하에 있었으나 낙성에서 유비에게 항복해 그의 장수가 되었다. 제갈공명의 남만 정벌 때 부장(副將)으로 출전했고, 제갈공명이 죽은 뒤 대장군이 되어 강유와 함께 활약했다. 뒤에 종회가 성도 탈환을 위해 공격해 왔을 때 이를 맞아 싸우다 전사했다.

 

손소孫韶

손권의 대장. 자는 공례(公禮). 본시 유씨(兪氏)였으나 손책에게 총애를 받아 주인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조비가 남침했을 때 수장 서성의 명령을 어기고 조비의 본진을 습격하여 공을 세웠다. 손권이 대위(大位)에 오르자 진북장군 유주목이 되었다.

 

제갈첨諸葛瞻(227~263년)

제갈공명의 아들. 자는 사원(思遠). 촉나라의 위장군(衛將軍). 263년 위나라 군사가 대거 침공하여 성도에 이르렀을 때 면죽에서 방어선을 쳤으나 등애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

 

진랑秦朗

위(魏)의 중신. 아명은 아소(阿蘇). 모친이 조조의 측실이 되었기 때문에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후에 명제(明帝)의 눈에 들어 효기장군 · 시종장 등을 지냈다.

 

가충賈充(217~282년)

가규의 아들. 자는 공려(公閭). 위 · 진 교체기에 사마씨(司馬氏)의 심복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에 오나라에 대한 대응책으로 화평을 주장했다. 딸은 혜제(惠帝)의 황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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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3. 26. 16:57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31 서낭당

 

글 / 이종철, 박호원●사진 / 송봉화

1994,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14

 

082

빛12ㄷ  158

 

빛깔있는 책들 158

 

이종철-------------------------------------------------------------------------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하고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연수차 일본 동경대학에 머물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였으며, 주요 논저로 「한국 장승 신앙에 관한 연구」, 『남녘의 벅수』 등 다수가 있다.

 

박호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민속학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로 있다. 논문으로 「솟대 신앙에 관한 연구」, 「고려 무속 신앙의 전개양상과 그 내용」 등이 있다.

 

송봉화-------------------------------------------------------------------------

충북 청원 출생으로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민속사진가로 활동하고 있다. 사진집으로 『솟대』, 『미륵불』 등이 있다.

 

|차례|

 

서낭당의 개념과 어원

    서낭당이란

    어원(語原)

발생 배경

    서낭당의 유래담

    서낭[石積]의 등장과 그 의미

    서낭의 상징성

서낭 신앙의 기원과 전개

    서낭 신앙의 기원

    성황(城隍)의 전래

    성황과 서낭

형태와 유형

    서낭당의 분포

    서낭당의 형태

    돌탑

    서낭당의 유형

서낭 신앙의 현지 사례

    강원 지역의 서낭 신앙

    경상도의 서낭 신앙

서낭 신앙의 두 가지 양상과 그 특성

서낭 신앙의 의의

주(註)

참고 문헌

 

▲ 무덤 주위에 쌓은 돌담  경계 표시로 돌을 쌓은 예이다. 석적이 어떤 기념 표시물이나 경계표로 조성되고 있어 경계 밖의 사람들에게는 금표적인 의미와 경계 수호의 뜻을 지닌다. 제주도.

▲ 선돌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통과를 의미하는 경계표의 의미를 지닌다.

▲ 강릉시 강동면 정동에 있는 성황당

▲ 성황사

▲ 성황제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들을 사후 성황신으로 섬긴 경우가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무장(武將)이라는 점이다.

▲ 채기를 들고 마을을 도는 모습  성황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공동제의 성격을 띤다. 충남 당진의 풍어제

▲ 솟대  서낭으로 신앙되는 솟대는 서낭제의 한 부분을 구성하며 서낭신의 역할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갖는다.

▲ 해신당

▲ 해랑당  안인진에서는 여신에게 남근을 봉헌하던 것을 위패로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는 남녀신의 합위(合位)에 의해 더 이상 여신에게 남근을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여신에 대한 남근 봉안이 좀더 고대의 신앙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안인진리.

 

 

 

 

 

 

 

 

 

 

 

 

 

 

 

 

 

 

 

 

 

posted by 황영찬
2013. 3. 22. 16:32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9-2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태릉泰陵

 

■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의 태릉

■  세조 이후 사라진 병풍석이 등장한 능

■  태릉의 무인석

■  익랑 1칸이 더 있는 정자각

 

강릉康陵

 

 

■  외척에 시달린 유약한 왕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

■  비공개 능인 강릉의 정자각

■  이끼가 가득한 참도 박석

 

목릉穆陵

 

■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왕 선조의 능

■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덕능마을 표지석

■  정릉동행궁이라 불렀던 경운궁의 편액

■  의인왕후의 능

■  인목왕후의 능

■  인목왕후릉에서 바라본 정자각. 신로神路가 구불구불 연결되어 있다.

■  선조릉의 무인석

■  우람하지만 조형미가 떨어지는 선조릉의 석물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의 능, 대원군의 묘제를 따랐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 공성왕후로 추승되어 한때 성릉으로 불렸던 공빈 김씨의 묘

■ 5단의 계단을 두어 위엄을 드러낸 참도

 

장릉長陵

 

■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와 인렬왕후의 합장릉

■ 모란문양이 선명한 병풍석. 12지신상이 아닌 모란무늬가 최초로 등장했다.

■ 조선왕릉 중에서 제일 넓은 참도를 자랑하고 있는 장릉

■ 곡장 뒤 잉이 두드러진 장릉

 

휘릉徽陵

 

■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른 장렬왕후의 휘릉

■ 휘릉의 문인석

 

영릉寧陵

 

■ 효종의 능

■ 인선왕후의 능

■ 조선왕릉 재실의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영릉의 재실

■  참도 중간에 위치한 특이한 금천교

 

숭릉崇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

■  동구릉 권역의 능 가운데 유일한 비공개 능인 숭릉

■  팔작지붕으로 된 정자각

 

명릉明陵

 

■  정자각에서 바라본 명릉. 왼쪽이 인원왕후의 능이고 오른쪽이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다.

■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궁궐에서 쫓겨난 인헌왕후가 머물렀던 감고당. 여주에 있다.

■  관습을 깨고 임금의 우측에 자리잡은 인원왕후의 능

■  인원왕후의 능에서 바라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  작고 아담한 명릉의 무인석

 

익릉翼陵

 

■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

■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은 장희빈의 묘

■  숙빈 최씨의 묘. 영조는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를 추승했으나 소령원으로 격상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의릉懿陵

 

■  동원상하릉인 의릉. 오른쪽이 선의왕후의 능이고 왼쪽이 경종의 능이다.

■  의릉 경내를 파고든 중앙정보부 건물. 1972년 이후락 정보부장이 이곳에서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  경종의 능. 석물이 작고 아담하다.

■  의문을 남긴 채 잠든 선의왕후의 능

 

혜릉惠陵

 

■  지아비와 함께하지 못하고 홀로 잠든 단의왕후의 혜릉

■  혜릉의 홍살문

■  주춧돌만 남아 있는 수복방 터

 

원릉元陵

 

■  유지와 달리 정순왕후 곁에 묻힌 영조. 왼쪽이 영조, 오른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  장희빈이 들어와 칠궁이 된 육상궁 입구

■  영조는 자신의 생모 숙빈묘를 소령원으로 격상했다.

■  뒤에서 바라본 원릉. 왼쪽이 정순왕후, 오른쪽이 영조의 능이다.

 

홍릉弘陵

 

■  영조와 함께 66세까지 해로한 정성왕후의 홍릉

■  홍릉 능침. 오른쪽 영조의 자리가 비어 있다.

■  아담한 홍릉의 무인석

■  참도 절반이 박석이 아니라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융릉隆陵

 

■  뒤에서 바라본 장조와 헌경왕후의 합장릉

■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던 문정전 뜰

■  현륭원으로 불리던 장헌세자와 헌경왕후의 합장릉은 고종에 의해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  융릉 입구

 

건릉建陵

 

■  좋은 땅에서 촉촉한 땅으로 천장된 건릉

■  규장각 편액

■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

■  정조가 숨을 거두었던 영춘헌

 

인릉仁陵

 

■  막강한 세도정치에 휘둘린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

■  인릉의 정자각과 비각 그리고 배위

■  왕릉을 둘러싼 석물들이 단아하다.

 

경릉景陵

 

■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삼연릉 형식을 취한 경릉

■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왕후, 오른쪽이 효정왕후다.

■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지어준 창덕궁 낙선재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의 합장릉인 수릉

■  정자각에서 바라본 수릉

 

예릉睿陵

 

■  힘없는 군주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

■  원범이 살았던 강화도 잠저. 용흥궁

■  뒤에서 본 예릉. 왼쪽이 철인왕후, 오른쪽이 철종의 능

■  3도로 이루어진 예릉의 참도

 

홍릉洪陵

 

■  대한제국을 선포하여 황제로 즉위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  명성황후가 성장했던 감고당

■  황제릉 양식에 맞춰 3도로 구성된 참도

 

유릉裕陵

 

■  유릉은 순종과 정비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동봉상실형 합장릉이다.

■  신도를 강조한 참도가 이채롭다.

■  모란무늬가 선명한 병풍석

 

 

posted by 황영찬
2013. 3. 20. 12:09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9-1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  참도처럼 황계를 하나 더 만들어 계단이 3개가 된 동계

 

현릉顯陵

 

■  문종과 현덕왕후의 동원이강릉

■  현덕왕후의 능

■  문종의 능

■  병풍석과 난간석

■  세조 이후 채택된 동원이강릉.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릉이다.

 

장릉莊陵

 

■  단종을 모신 장릉

■  단종이 유배생활을 했던 청령포

■  단종의 유배지인 어소

■  장릉의 능선

■  정자각에서 바라본 장릉. 급경사를 이루어 능이 보이지 않는다.

■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

 

사릉思陵

 

■  정순왕후의 사릉

■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곳에 세워진 정업원의 후신 청룡사

■  정순왕후가 단종이 보고 싶으면 올랐다는 동망봉에 세워진 정자

■  홍살문에서 바라본 능침

 

경릉敬陵

 

■  뒤에서 본 소혜왕후의 능

■  추존 왕 덕종의 능

■  소혜왕후의 능

■  세조가 공들여 찾은 명당 경릉

 

공릉恭陵 · 순릉順陵 · 영릉永陵

 

■  장순왕후의 공릉. 추존 왕후릉이기 때문에 난간석이 없다.

■  한명회의 넷째 딸인 공혜왕후의 순릉

■  겸재 정선이 그린 압구정. 한명회의 별장이었다.

■  진종과 효순왕후 쌍릉인 영릉. 공릉과 마찬가지로 추존 왕이기 때문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없다.

 

광릉光陵

 

■  집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세조의 능

■  뒤에서 바라본 정희왕후의 능

■  뒤에서 바라본 세조의 능

■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흙길이다.

■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길고 가파른 사초지

 

창릉昌陵

 

■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이 예종, 오른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  예종의 능

■  안순왕후의 능

■  왕릉과 비호교. 뭔가 어색하다.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채 잠든 성종의 능

■  정현왕후의 능

■  선릉의 무인석

■  선릉의 문인석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의 정릉

■  중종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의 묘

■  조선왕릉 중 가장 낮은 지대로 침수 위험에 노출되었던 정릉

■  웅장한 정릉의 문인석

 

온릉溫陵

 

■  반정 이후 사가로 쫓겨난 단경왕후의 온릉

■  인왕산 치마바위

 

희릉禧陵

 

■  정적 제거에 이용된 장경왕후의 희릉

■  희릉의 문인석

■  희릉의 무인석

■  정자각의 익랑이 3칸이다.

 

효릉孝陵

 

■  병풍석을 두른 왕릉과 난간석만 두른 왕후릉이 이채롭다.

■  효릉의 참도

■  효릉 권역에 조성된 축협 초지

■  태종의 헌릉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소전대

■  소전대와 함께 위치한 예감

 

 

 

 

 

 

 

 

 

 

 

 

 

 

 

 

 

 

 

 

 

 

 

 

 

 

 

posted by 황영찬
2013. 3. 18. 09:30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30 운주사

 

글 / 이태호, 천득염, 황호균●사진 / 유남해, 황호균

1996,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13

 

082

빛12ㄷ  157

 

빛깔있는 책들 157

 

이태호(전남대학교 교수 · 미술사)------------------------------------------------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미학 · 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의 학예연구사를 거쳐 지금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교수로 있다. 그 동안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고구려 고분 벽화」「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김홍도의 진경산수」「다산 정약용의 예술세계」「1940년대의 친일 미술」 등의 논문과 평론집 『우리 시대, 우리 미술』을 펴냈다.

 

천득염(전남대학교 교수 · 건축사)------------------------------------------------

전남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지금은 전남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부교수로 있다. 그 동안 「백제계 석탑의 조형 특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실상사 3층석탑의 조형비에 관한 연구」「운주사 석탑의 조형적 특성에 대한 고찰」 등의 논문과 『전남의 전통 건축』 등의 단행본을 집필하였다.

 

황호균(전남대 박물관 학예연구사 · 미술사)----------------------------------------

전남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전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을 거쳐 지금은 학예연구사로 있다. 그 동안 운주사의 2 · 3 · 4차 발굴과 연곡사 시굴조사의 연구원으로 현장에 상주하였고 「운주사 불상조각의 형식적 특징과 편년 고찰」「연곡사의 불교유적 · 유물」 등의 보고서와 「전남지역의 괘불에 대한 일고찰」「선암사 불교 회화의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유남해(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진기자)--------------------------------------------

『진경산수화』『한국전통회화』『조선시대고문서』『무등산』 등 많은 도판 사진집을 제작하였고 한국관광사진콘테스트에서 준우수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에 근무하면서 포토에세이 등을 통해 활약하고 있다.

 

|차례|

 

좌절된 불사의 현장

    도선(道詵)의 창건 설화가 신비감을 부추긴 불적

운주사의 석탑

    석탑의 현황과 명명(命名)

    석탑의 형식 분류

    석탑의 구성 요소

    석탑의 양식적 특성

    석탑의 건립 배경

    고려 초의 시대상과 건탑 양상

    풍수지리설의 유행과 건탑

    석탑의 건립 기간

불상

    불상의 현황과 명명(命名)

    독립형 석불

    석조 불감 안의 남 · 북쪽 석불 좌상

    암벽군형 석불

    금동 여래 · 보살 입상과 소조 불두편

    불상의 양식적 특징

    불상의 건립 배경

칠성바위와 돌을깨고 나른 흔적들

    칠성석

조성 시기의 문제와 최근의 발굴 성과

최선의 조형물로 조화를 이룬 도량

주(註)

 

 

▲ 운주사 남쪽 골짜기 모습

▲ 탑과 불상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 계곡 여러 탑들의 모습

▲ 원반형 다층석탑  일명 연화탑 또는 호떡탑이라 불리며 보물 제789호로 지정되엇다. 탑신과 옥개가 원반형으로 우리나라의 탑에서는 유래가 없다.

▲ 7층석탑 1  옥개석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탑과 같다.

▲ 7층석탑 2  탑신에 교차문양이 있고 잘 다듬은 방형 기단의 탑이다.

▲ 7층석탑 3  옥개석이 얇고 넓으며 약한 귀솟음이 있어 백제계 탑의 형식이다.

▲ 원반형 석탑  실을 감는 실패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는 3층 정도였을 것이다.

▲ 9층석탑  운주사 골짜기의 남쪽 입구에 위치하여 보물 제796호로 지정된 면석과 옥개석의 문양이 특이한 석탑이다.

▲ 원구형 석탑  떡시루나 주판알 모양의 이색적인 탑이다.

▲ 조선 후기에 탑을 수리한 흔적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19세기 초에 설담 자우 스님이 천불천탑을 수리한 뒤 운주사 약사전을 중건하면서 이처럼 어설픈 탑 모습이 되어 버렸다.

▲ 탑과 불상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 머슴 부처  와불을 지킨다 하여 시위불 또는 머슴 부처라 불리는 눈 속의 돌부처

▲ 석조 불감  돌로 만든 건물에 두 돌부처가 등을 대고 앉아 있는 이 석조 불감은 지붕과 벽체를 시멘트로 보수하여 흉물스럽다.

▲ 석조 불감의 옛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으로 지붕과 용마루 부분이 지금의 모습과 달라 이런 모습으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 광배를 가진 돌부처  운주사에서는 드물게 광배를 가진 돌부처이다. 발굴 조사 때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온 점으로 미루어 조선 후기에는 목조 기와집에 모셨던 듯하다.

▲ 마애불  공사바위 아래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중요한 자리인 암벽 벼랑에 부처를 새긴 뜻은 과연 무엇일까?

▲ "가" 석불군의 옛모습  『조선고적도보』 사진으로 대좌가 온통 흙 속에 묻혔고 불상 배열도 좀 다르다.

▲ "가" 석불군의 협시 돌부처

▲ "나" 석불군의 모습  이 돌부처들은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 출연료를 한푼도 받지 않고 출연했다.

▲ "나" 석불군의 주존 돌부처  높이가 475센티미터로 운주사에 서 있는 돌부처 가운데 가장 크다.

▲ "다" 석불군 주존 돌부처

▲ 미완성 돌부처

▲ "라" 석불군의 옛모습  『조선고적도보』의 사진

▲ "마" 석불군의 모습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으로 암벽 불상군의 전형적 형태이며 대형 석불 입상은 행방을 찾을 수 없다.

▲ "마" 석불군의 주존 돌부처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서는 상대 · 중대 · 하대석을 제대로 갖추었으나 지금은 넘어져 코가 깨지고 상대석만 남아 있다.

▲ "마" 석불군의 파손 불두  부처의 머리에 5개의 구멍이 나 있는데 눈, 코, 귀, 입 등을 잘 다듬어 놓고 어떤 연유로 이렇게 한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돌을 쪼개려는 채석 구멍과는 다른데 사람들은 이 구멍 만지기를 좋아한다.

▲ "바" 석불군의 옛모습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석불군 주변의 황량한 모습

▲ "바" 석불군

▲ 칠성바위  바위의 지름이 북두칠성의 별 밝기와 비례하고 배치 간격이나 각도가 북두칠성과 유사하여 북두칠성 신앙의 주요 유적지이다.

▲ 모전석탑 2  벽돌탑 모양을 돌로 만든 탑으로 낙뢰를 맞은 탓인지 옥개석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 5층석탑  면석을 다듬지 않은 납작한 돌을 썼으나 조형미가 아름답다. 일명 거지탑이라고 불린다.

 

posted by 황영찬
2013. 3. 15. 14:10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9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이정근 지음

2010, 책보세

 

 

시흥시대야도서관

SB039503

 

911.05

이74ㅅ

 

권력투쟁과 풍수로 읽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이야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조선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제되었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이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조영되었으며, 엄격한 질서에 따라 내부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주목할 만한 신성한 공간을 창출하였고, 봉분과 조각,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탁월한 사례로 동아시아 묘제의 중요한 발전단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561년간 진행된 장엄한 역사役事의 산물,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1405년, 박자청이 제릉을 수축한 이후 그 구조가 조선 후기까지 거의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왕릉 수축은 1966년 순정효황후를 유릉에 안장함으로써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장장 6세기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조선왕릉은 561년간 진행된 대역사役事의 산물이다.

지구상에는 수많은 황제릉과 왕릉이 있다. 그러나 자연과 어우러진 능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왕릉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인위적으로 쌓아올리지도 않았고 중국의 진시황릉처럼 거대한 지하궁전을 만들지도 않았다. 10자(3.3미터) 이상 파면 기氣가 증발한다는 풍수사상도 한몫했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연을 사랑하는 선조들의 생각이 배어 있다. 이러한 조선왕릉(북한에 있는 제릉, 후릉을 제외한 40기)은 2009년 6월 30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가 우리의 조선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 데는 '훌륭한 문화유산을 세계인이 공유하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것이다.

- <들어가며> 중에서

 

이정근李廷根

이정근은 참으로 독특한 사람이다. 무려 8000만 자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과 함께 20여 년을 보냈다. 기나긴 세월 눈 맞춤이 피곤하지 않느냐는 지인들의 구박에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보면 볼수록 새로움이 솟아난다'며 의욕을 감추지 않는다. 행간을 읽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이방원전》을 연재해 네티즌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백성들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다면서 나머지 생애도 실록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은 책으로는 중국 현지를 발로 뛰며 쓴 역사소설 《소현세자》와 《이건 몰랐지, 조선역사》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조선왕릉

세계유산은 1972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에 의거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지칭한다. 인류의 보편적이고 뛰어난 가치를 지닌 각국의 부동산 유산이 등재되는 세계유산의 종류에는 문화유산, 자연유산 그리고 문화와 자연의 가치를 함께 담고 있는 복합유산이 있다.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조선왕릉 40기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조선왕릉이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조영되었으며, 엄격한 질서에 따라 내부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주목할 만한 신성한 공간을 창출하였고, 봉분과 조각, 건축물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탁월한 사례로 동아시아 묘제의 중요한 발전단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또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 제례의식을 거행하면서 살아 있는 전통을 간직한 독특한 공간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차례

 

· 건원릉建元陵  | 조선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 정릉貞陵  | 조선 최초의 국모 신덕왕후

· 헌릉獻陵  | 철권으로 조선의 기틀을 잡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 영릉英陵  | 조선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 현릉顯陵  | 세종의 분신 문종과 현덕왕후

· 장릉莊陵  | 비운의 왕 단종

· 사릉思陵  | 가장 슬픈 왕비 정순왕후

· 경릉敬陵  | 요절한 덕종과 파란의 소혜왕후

· 공릉恭陵과 순릉順陵 그리고 영릉永陵  | 시대를 풍미했던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공혜왕후 그리고 추종왕 진종과 효순왕후

· 광릉光陵  | 계유정난으로 등극한 세조와 정희왕후

· 창릉昌陵)  | 유약한 왕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 선릉宣陵  | 비극의 씨앗을 남긴 성종과 정현왕후

· 정릉靖陵  |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

· 온릉溫陵  | 치마바위 전설로 유명한 단경왕후

· 희릉禧陵  |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한 장경왕후

· 효릉孝陵  | 독살설과 함께 잠든 인종

· 태릉泰陵  | 불교를 사랑한 문정왕후

· 강릉康陵  | 외척의 농단에 휘둘린 명종 그리고 인순왕후

· 목릉穆陵  | 서자 출신 왕 선조와 의인왕후 그리고 인목왕후

· 장릉章陵  | 재위하지 않았던 왕 원종과 인헌왕후

· 장릉長陵  | 가장 용렬한 왕 인조와 인렬왕후

· 휘릉徽陵  | 예송논쟁에 휘말린 장렬왕후

· 영릉寧陵  | 북벌을 주창했던 효종과 인선왕후

· 숭릉崇陵  | 외국에서 태어난 왕 현종과 과격한 성품의 명성왕후

· 명릉明陵  | 치마폭에 휩싸였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

· 익릉翼陵  | 꽃피우지 못하고 잠든 인경왕후

· 의릉懿陵  | 식물임금 경종과 선의왕후

· 혜릉惠陵  | 세자빈 신분에서 왕후로 추존된 단의왕후

· 원릉元陵  | 묻히고 싶은 곳에 잠들지 못한 영조와 정순왕후

· 홍릉弘陵  | 무수리 출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신 정성왕후

· 융릉隆陵  |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헌경왕후

· 건릉健陵  | 개혁군주 정조와 효의왕후

· 인릉仁陵  | 순조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근원지 순원왕후

· 경릉景陵  | 풍류를 사랑했던 헌종과 효현왕후 그리고 효정왕후

· 수릉綏陵  |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 예릉睿陵  | 강화도령 철종과 철인왕후

· 홍릉洪陵  | 망국의 중심에 서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

· 유릉裕陵  |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과 순명효황후 그리고 순정효황후

■  조선왕릉의 구조

■  조선왕릉 분포도

 

건원릉建元陵

 

■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중앙에 배위가 있다.

■  병풍석에 조각된 십이지신상

■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가 봉분에 만발해 있다.

■  태조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 신도비는 태조, 태종, 세종의 것만 전해지고 있다.

■  건원릉

 

정릉貞陵

 

■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 장명등이 4각이다.

■  고려시대 양식을 띠고 있는 혼유석과 받침돌

■  경운궁(덕수궁)에 남아 있는 흥천사 종

■  청계천 복원 당시 출토된 병풍석

■  받침돌은 현종 시대 양식이고 몸통은 고종 시대 양식인 망주석

■  최근에 발견된 소전대

 

헌릉獻陵

 

■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 혼유석과 문 · 무인석이 2쌍씩이다.

■  어도와 신도의 구분 없이 단아한 참도

■  신계와 어계가 초라하리만큼 간소한 동계

■  돈을 태우는 곳인 소전대

■  난간석으로 연결된 태종과 원경왕후릉. 혼유석과 장명등이 2쌍이다.

 

영릉英陵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인 영릉

■  소헌왕후의 재궁이 잠시 머물렀던 낙천정

■  구 영릉의 장명등과 문인석

■  구 영릉의 난간석

■  참도가 3도로 만들어져 있고 조선왕릉에 없는 각도로 꺾여 있다.

 

 

 

 

 

 

 

 

 

 

 

 

 

 

 

 

 

 

 

 

 

 

 

 

 

 

 

 

 

 

 

 

 

 

 

 

posted by 황영찬
2013. 3. 15. 11:16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8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법정

2010, 샘터

 

 

시흥시대야도서관

SB042848

 

220.4

법74ㅅ

 

나는 내 삶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도 닮지 않으면서 내 식대로 살고 싶다.

자기 식대로 살려면 투철한 개인의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 질서에는 게으르지 않음과 검소함,

단숨함과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도 포함된다.

그리고 때로는 높이높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깊이깊이 잠기는 삶의 리듬도 뒤따라야 한다.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각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법정法頂

 

70년대 후반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지어 홀로 20년을 사신 뒤 지금은 강원도 산골 작은 오두막에서 청빈과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고 계신다.

자연의 벗이 된 후, 자연이 주는 가르침을 곧고 정갈한 글을 통해 세상에 나눠주고 계신다.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길상사' 회주를 맡아 가끔씩 산에서 내려오시는데 변하지 않는 침묵과 무소유의 철저함이 마치 자연을 닮은 곧은 나무를 보는 듯하다.

스님의 향기가 배어 있는 작품으로 <서 있는 사람들>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텅빈 충만> <영혼의 모음> <무소유> <산에는 꽃이 피네> 등이 있다.

 

조금만 더 따뜻하고 조금만 더 친절해질 일이다.

우리 모두는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된다.

 

차례

 

대지로 돌아가라

 

눈 고장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눈 고장에서

식물도 알아듣는다

섣달 그믐밤

과일을 잘 고르는 엄마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남도기행

입하절의 편지

생명을 가꾸는 농사

당신은 조연인가 주연인가

떠오르는 두 얼굴

가을바람이 불어오네

수행자에게 보내는 편지

아메리카 인디언의 지혜

내가 사랑하는 생활

청빈의 향기

거룩한 가난

겨우살이 이야기

등잔불 아래서

봄나물 장에서

 

산에는 꽃이 피네

정직과 청빈

꽃처럼 피어나게

새벽에 귀를 기울이라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

광복절에 생각한다

적게 가지라

밖에서 본 우리

가장 좋은 스승은 어머니다

농촌을 우리 힘으로 살리자

야생동물이 사라져 간다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맑은 물을 위해 숲을 가꾸자

종교와 국가권력

선진국 문턱은 낮지 않다

침묵과 무소유의 달

덜 쓰고 덜 버리기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신문

죽이지 말자, 죽게 하지도 말자

산하대지가 통곡한다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외국산 식수가 밀려든다

 

살아 있는 부처

밀린 이야기

에게 해에서

차 이야기

직업인가 천직인가

친절하고 따뜻하게

박새의 보금자리

너는 누구냐

신선한 아침을

연꽃 만나러 가서

새로 바른 창 아래서

어떤 가풍

마하트마 간디의 오두막

먹어서 죽는다

얼마만큼이면 만족할 수 있을까

흥겹고 멋진 음악처럼

가족끼리 대화를 나누라

넘치는 정보 속에서

눈 속에 매화 피다

얻는 것만큼 잃는 것도 있다

살아 있는 부처

스승과 제자

출가 수행자들에게

 

새가 깃들지 않는 숲을 생각해 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있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 거나 다름이 없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배고파 밥을 먹으니

밥맛이 좋고

 

자고 일어나 차를 마시니

그 맛이 더욱 향기롭다

 

외떨어져 사니

문 두드리는 사람 없고

 

빈집에 부처님과 함께 지내니

근심 걱정이 없네.

- 충지沖止 스님(고려시대 원감圓鑑)

 

날마다 산을 봐도

볼수록 좋고

 

물소리 노상 들어도

들을수록 좋다

 

저절로 귀와 눈

게 트이니

 

소리와 빛 가운데

평안이 있네.

- 충지 스님(고려시대 원감)

 

우는 것이 벅구기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어촌 두어 집이 냇속에 들락날락

말가한 깊은 소에 온갖 고기 뛰노나다.

- 고산의 <어부사시사> 중 '춘사春詞'의 한 구절

 

"날마다 그대 자신을 온전히 새롭게 하라. 날이면 날마다 새롭게 하고, 영원히 새롭게 하라!"

- 중국 탕왕의 욕조에 새겨진 글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

- 양관 화상良寬和尙(1758~1831)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 송강 정철

 

고요한 밤 초암草庵 안에서

홀로 줄 없는 거문고를 탄다

가락은 바람과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그 소리 시냇물과 어울려 깊어간다

물소리 넘칠 듯 골짝에 가득 차고

바람은 세차게 숲을 지나간다

귀머거리가 아니고야

그 누가 이 희귀한 소리를 알아들으랴.

- 양관良寬 선사

 

있고 없음은 서로를 낳아주고, 쉽고 어려움은 서로를 이루어주며, 길고 짧음은 상대를 드러내주고, 높고 낮음은 서로를 다하게 하며, 음과 소리는 서로 화답하고, 앞과 뒤는 서로를 뒤따른다.

- 노자老子

 

벗은 발로 부드러운 밭 흙을 밟으면서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며

김을 매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느긋하고 편안하다.

방 안에 앉아 좌선할 때보다도

훨씬 즐겁고 신선하다.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신의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모든 생명은 안락을 바라는데

폭력으로 이들을 해치는 자는,

자신의 안락을 구할지라도

그는 안락을 얻지 못한다.

- 《법구경

 

당신은 얼마만큼이면 만족할 수 있는가?

가을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듯이, 자신의 인생에서

나이가 하나씩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아는가?

적게 가지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내려다보라.

 

나는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조그만 가게임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 조그만 당신의 가게에

사람 마음의 아름다움을

가득 채우자.

 

개울물이 산 아래로 내려감은

무슨 뜻이 있어서가 아니요

한 조각 구름 마을에 드리움은

별다른 생각 없이 무심함이라

세상 살아가는 일

이 구름과 물 같다면

무쇠나무鐵樹에 꽃이 피어

온 누리에 봄이 가득하리.

- 차암 수정此庵守靜(송나라의 선승禪僧)

 

마음밭에 갖가지 씨앗 있어

비를 맞으면 다 싹이 트리라

삼매의 꽃은 그 모습 없나니

어찌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하리.

- 희양 선사

 

우리 방은 창으로 눈을 삼았다

종이 한 장으로 우주를 가렸지만

영원히 태양과 함께 밝을 대로 밝는다

너의 앞에서는 술 먹기도 두렵다

너의 앞에서는 참선하기도 어렵다

진귀한 고서를 펼쳐 서권기書卷氣나 기를까

나의 추와 미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나의 고와 낙도 네가 가장 잘 알리라

그러니 나의 임종도 네 앞에서 하려 한다.

- 가람 이병기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불일암 수칙

 

이 도량에 몸담아 사는 수행자는 다음 사항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Ⅰ.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인 계행戒行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일로 정진을 삼는다.

Ⅰ. 도량이 청정하면 불 · 법 · 승 삼보가 항상 이 암자에 깃들인다. 검소하게 살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잡담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침묵의 미덕을 닦는다.

Ⅰ. 방문객은 흔연히 맞이하되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가도록 한다. 특히 젊은 여성과는 저녁 공양을 함께 하지 않고 바래다 주거나 재우지 않는다.

Ⅰ. 부모형제와 친지들을 여의고 무엇을 위해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지 매순간 그 뜻을 살펴야 한다. 세속적인 인정에 끄달리면 구도 정신이 소홀해 진다는 옛 교훈을 되새긴다.

Ⅰ. 이 수칙을 지키는 수행자에게 도량의 수호신은 환희심을 낼 것이다.

Ⅰ. 이상.

 

산수간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든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의 뜻에는 내분인가 하노라.

- 고산孤山 윤선도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 지어 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황금이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

욕망에는 짧은 쾌락에

많은 고통이 따른다.

- 《법구경

 

심심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 청마靑馬의 <심산深山>

 

남해의 신선이 사뿐히 땅에 내려

달빛에 흰옷 입고 와서 문을 두드리네.

- 소식蘇軾의 매화성개梅花盛開

 

매화 가지를 꺾다가 역부를 만나서

몇 가지 묶어서 멀리 계신 그대에게 보내오

강남에 별로 자랑할 게 없어서

오로지 한 가지 봄을 드리오.

- 육개陸凱

 

매화 옛 등걸에 새봄이 오니

맑은 향기 산가山家에 넘쳐 흐른다.

가물가물 타는 심지 다시 돋우고

이 밤을 함께 새는 두 해 된 꽃.

- <양화소록> '섣달 그믐밤에 매화를 대하여'

 

물 속의 물고기가 목말라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웃는다

부처란 그대의 집 안에 있다

그러나 그대 자신은 이걸 알지 못한 채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쉴새없이 헤매고 있네

여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잇는 부처를 보라

그대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보라

이 도시로 저 산속으로

그러나 그대 영혼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은 여전히 환상에 지나지 않으리.

- 카비르(15세기 인도의 시인)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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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영찬
2013. 3. 14. 09:48 내가 읽은 책들/2013년도

2013-027 법주사

 

글 / 최현각, 김봉렬, 소재구●사진 / 김종섭

1994, 대원사

 

시흥시대야도서관

EM018012

 

082

빛12ㄷ 156

 

빛깔있는 책들 156

 

연혁 - 최현각------------------------------------------------------------------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선학과 교수이며 선학연구소장으로 있다. 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불교대학원 교학부장, 정각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인도의 선, 중국의 선』『선의 길』『종교학 종교심리학』 등의 역서가 있으며 "선의 실천 철학 연구" "근본 선정관 소고" "선학자료논고 ·Ⅱ" "간화선 성립배경"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건축 - 김봉렬------------------------------------------------------------------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영국 AA School에서 연수를 마쳤다. 현재 울산대학교 건축학과 부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재전문위원, 한국건축역사학회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불교건축에 대한 다수의 논문과 현대건축에 대한 비평문이 있다. 저서로 『한국의 건축 - 전통건축편』, 보고서로 『병산서원』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이 있다.

 

유물 - 소재구------------------------------------------------------------------

국민대학교 국사학과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현재 동 대학원 박사과정 중에 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에 근무하고 있다. "원각사지 3층석탑의 연구" "동문선의 불탑자료" "우리나라의 불탑" "고달원지 승탑편년의 재고"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차례|

 

속리산 이야기

    호서 제일 법주사

법주사 건축

    지형과 가람의 터

    가람의 배치 구조

    건물들

법주사의 유물

    불상 조각

    석조 유물

    불교 회화, 금속 유물, 그 밖의 유물

법주사 소장 유물 일람표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상환암에 걸려 있는 "호서제일가람" 현판

▲ 상환암 원통보전

▲ 개산조라 알려져 있는 의신 조사 영탱

▲ 법주사 경내

▲ 진영각  최근에 지은 건물로 건축적인 품격은 논할 바 못 되나 역대 조사와 강사들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 진영각 내부에 봉안된 조사 영탱

 

시방 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있고 없다는 것이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한데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네.

(透出十方昇 無無無亦無 個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

 

덕숭산맥 아래

무늬없는 인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 아래 내리고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나네.

(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 중원 미륵대원 전경  축성을 중시한 미륵 사찰의 전통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중원 미륵대원의 경우는 반석굴 형식의 본전을 향해 중심축선상에 석탑과 석등이 배열되었다.

▲ 논산 관촉사 법당에서 바라본 미륵불상  논산 관촉사는 은진 미륵을 향해 법당 - 석탑 - 석등이 일직선을 이루고 잇다. 또한 둘러싸인 마당이 없어 영역성이나 중심성을 얻기보다는 오로지 중심 구성축의 강렬함에 지배되고 있다.

 

용이 탑 속으로 돌아가니 사리가 남아 있고

노새는 바위 앞에 누워 성스런 자취를 찾네

우리나라를 복되게 하실 이 그 누구인가

산호전 위에 계신 자금색 부처님이시네

- 박효수

▲ 법주사 배치도

▲ 법주사 전경

▲ 팔상전

▲ 팔상전 입면도

▲ 팔상전 단면도

▲ 팔상전 1층 평면도

▲ 팔상전 내부 공간  목탑의 장점은 내부 공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3층까지 하나의 공간으로 트여 중심칸 주위를 순회할 수 있는 내부를 가진다.

▲ 일본 호류우지 5층탑  아래층과 꼭대기층의 규모가 크게 변하지 않는 수직적인 형태가 목조 탑파의 규범으로 여겨진다.

▲ 팔상전 사리구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 팔상전 내부의 불상과 불화  5층탑 내부 중심칸 사방에 벽을 치고 한 면에 2장씩의 팔상도를 걸었다. 각면 불단에는 중심불과 오백나한상들을 배열하였다. 석가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를 모시는 팔상전의 공간에 영산전 혹은 나한전의 기능까지 혼합한 것이다.

▲ 대웅보전 전경  법주사 대웅보전은 옛 기록에는 대웅대광명전으로 남아 있는 전면 7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이다. 2층 건물을 이루기 위해 내부에 2열의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 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한 구성이다.

▲ 대웅보전의 포작  대웅보전은 기둥 사이에도 포작이 있는 다포계 건물로 아래층은 2출목, 위층은 3출목의 서로 다른 포작을 갖는다. 포작의 모양도 위층은 곡선형, 아래층은 직선형이다.

▲ 대웅보전 계단석

▲ 원통보전의 현판

▲ 원통보전의 포작  기둥 위에 수평으로 얹은 평방이 있으면서도 기둥 위에만 포작을 쌓아 올린 주심포 형식이다. 포작은 내외 3출목의 규모이며 지붕은 홑서까래만 배열된 간략한 형식이다.

▲ 원통보전 전경  기단의 석조 수법으로 보아 팔상전과 같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1624년 벽암 선사 때 중건되었다. 정면 3칸 8.63미터, 측면 3칸 8.2미터 규모로 거의 정시각형에 가까우며 지붕의 형태는 사모지붕이다. 지붕 꼭대기에는 돌로 만든 절병통을 올려 놓았다.

▲ 천왕문  전면 5칸, 측면 2칸의 구성이지만 가운데칸만 넓고 양옆칸은 모두 좁고 높아 전체적으로 전면 3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교묘한 칸살이는 일반성을 유지하되 특수한 의도를 달성하려는 치밀한 계획의 결과이다. 가운데 3칸에는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게 하였고 두 끝칸에는 작은 판창을 달았다. 이것은 현재와는 다른 용도로 쓰였다는 증거가 되지만 구체적으로 예전에 어떻게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 옛 선희궁 원당

▲ 능인전 중앙칸

▲ 능인전  1624년에 중창된 건물로 뒤쪽에 세존의 사리탑이 있어 원래는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의 역할을 한 건물이지만 현재는 불상과 16제자상을 봉안해 영산전 또는 나한전의 기능을 갖는다.

▲ 용화전 내부의 미륵 반가사유상

▲ 금강문  사찰 진입로의 금강문은 1970년대에 재건된 것들이다. 형식은 이전의 것들과 같다 하더라도 목조 기술의 퇴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다.

▲ 복천암 전경

▲ 명부전과 삼성각  대웅보전 동쪽에 청동 미륵불 불사와 함께 조성된 전각군이다.

▲ 청동 미륵대불

▲ 시멘트제 미륵대불이 있던 옛 법주사의 모습

▲ 마애 여래 의상

▲ 지장보살상으로 추정되는 마애상

▲ 봉발석상

▲ 대웅보전 소조 비로자나 삼존불 좌상  법주사의 본당인 대웅전에 모셔진 이 3구의 거대한 불상은 흙으로 빚어 낸 작품으로 앉아 있는 불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 원통보전 목조 관세음보살 좌상

▲ 사천왕상  천왕문 안에 양쪽으로 2구씩 자리하고 있다. 첫번째는 지국천왕, 두번째는 광목천왕, 세번째는 증장천왕, 네번째는 다문천왕이다.

▲ 쌍사자 석등

▲ 사천왕 석등

▲ 석연지  8각의 댓돌 위에 커다란 반구형의 돌을 깎아 연못을 만들어 올려 놓은 이 석연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작품이며 석조물 전체에 꽃, 구름, 난초, 덩굴 등의 무늬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 세존 사리탑과 비  이 사리탑은 고려 말기인 1362년에 공민왕이 홍건적을 물리치고 법주사에 행차하여 경기도 양산 통도사에 있던 사리 1개를 법주사로 옮겨와 봉납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 복천암 수암 화상탑

▲ 복천암 학조 등곡 화상탑

▲ 자정 국존비

▲ 벽암 대사비

▲ 법주사 괘불

▲ 철확  금강문 가까이 보호각 안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는 조사가 뒤편의 석옹이 있는 곳에서 시냇가 쪽으로 3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이다. 높이가 1.2미터, 지름 2.7미터에 둘레 10.8미터, 두께가 10센티미터나 되는 이 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상당한 부피를 지니고 있다.

▲ 철당간과 당간 지주

▲ 선조 어필 병풍  이 병풍은 1758년 영조가 천문도 병풍을 포함한 4개의 병풍을 하사할 때 같이 보내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posted by 황영찬